BONGYEOL LEE
Bongyeol Lee
이봉열 화백은 1960~70년대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낳은 스타작가였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1961년 국전 문교부장관상, 1972년 국전 추천작가상을 잇달아 받았다.
그러고는 곧장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1938 황해도 연백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 회화과 졸
Selected Exhibitions
1963-1968 조선일보 기획 현대작가초대전, 국립미술관
1964-1981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1968 개인전, 신세계화랑
1968 한국 현역작가전, 국립미술관
1970 Cagnes 국제회화제, 프랑스
1970-1971 한국일보 기획 한국미술대상전 초대출품 우수상 수상, 국립미술관
1972 국전 추천작가상 수상
1973 한국 현대작가전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1975 Salon Grands et Jeunes d'aujourd'hui, 파리
1975 개인전 La Cour d'ingres 화랑, 파리
1976 Salon Des Realites Nouvelles, 파리
1977 한국 서양화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78 Salon De Mai, 파리
한국미술 20년 동향전, 국립현대미술관
인도 트리엔날, 뉴델리
1979 한국미술 오늘의 방법전, 미술회관
1981 Korea Drawing Now, 브르클린 미술관, 뉴욕
한국 현대미술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2 한국 현대미술전, 비스콘티 홀, 밀라노
한국 현대미술 위상전, 교토 시립미술관
개인전, 현대화랑
1983 한국 현대미술전, 동경 미술관외 5대 미술관 순회전
1984 삿포로 트리엔날, 삿포로 근대미술관
1986 서울-파리전, 파리 조형미술센타-Centre D'art Plastique, 파리
서울-아세아 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1988 한국 현대미술, 국립역사박물관, 타이페이
1989 한국 현대회화전, 호암갤러리
1990 개인전, 현대화랑
1991 한국 현대미술 초대전, 선재미술관
1992 서울-삿포로전, 서울 시립미술관
1993 한국 현대미술, 격정과 도전의 세대, 토탈미술관
1995 한국 현대회화전, 중국미술관, 베이징
1998 회화속의 몸, 한림미술관
1999 개인전, 갤러리 인
2017 개인전, 현대화랑
서양화가 이봉열은 1963년 첫 개인전을 열고 197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 작가를 역임했다. 1975년 파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칸 국제 회화제, 살롱드메(파리), 인도트리엔날레 등 다수의 국제전에 출품한 바 있다.
'선과 면에 의한 회화성을 추구하는 작가로 자율적인 조형언어를 구사해왔다'는 평이다. 김복영(미술평론가)은 '공간의 여정, 격자에서 몸까지'라는 평론에서 "그는 일찍이 자신의 세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공간의 문제가 주요 관심사였다. 그의 화맥은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또한 70년대에는 평면이라는 단위 공간을 어떻게 분절할 것인지에 역점을 두면서 격자구조에 관심을 보였다. 80년대에는 탈격자, 해체적 변주를 시도했으며, 90년대에는 몸의 개념을 통해 화면과 작가 자신을 일체화하는 데 관심을 쏟은 것으로 이해된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36세의 청년미술가 이봉열은 1973년 프랑스 파리 유학길 에 올랐다. 프랑스 미술계 최전선에 뛰어든 그는 자신만의 ‘무기’가 뭔지 고민하며 평면이라는 단위 공간을 어떻게 분절할 것인지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캔버스를 바라보는데 황해도 연백의 고향집 창호문양이 오버랩 됐다. 기하학적 분할을 기반으로 하는 ‘격자 구조’의 서정적 추상작업을 시작한 계기였다. 2년 반 남짓한 파리 유학은 미술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1980년대부터 점차 격자를 해체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1990년대 이후에는 화면과 몸의 움직임을 일체화하는 작업을 이어가며 ‘한국 모노크롬(단색화)회화의 선구자’ 반열에 올랐다.
이봉열 화백(80)의 파리 유학시절 이후 40여 년의 단색화 작업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전시회를 2017년 열었는데 ‘공간 여정’전이다. 80평생 그는 단 일곱 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2017 가졌던 개인전에서는 197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격자 구조에 의한 공간의 생성과 해체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 20여 점이 걸렸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입상한 이 화백은 1975년 파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칸 국제회화제, 파리 살롱드메, 인도트리엔날레, 일본 삿포로트리엔날레 등 국제전에 출전해 한국 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미술평론가 이구열 씨 동생인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과 숙명여대 교수를 지내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이 화백은 “일찍이 내 미학 세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공간의 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며 “작업실에 고독하게 파묻혀 우리의 일상을 감싸고 있는 공간을 해석하는 데 반세기를 보냈다”고 했다.
잠을 안 자고 밤에 작업하는 작가로 유명한 그는 초기엔 검정 회색 흰색의 마스킹 테이프를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격자무늬를 만들고, 황색 계열의 물감을 떨어뜨려 마치 표제 없는 음악처럼 화면을 구성했다.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이야기를 단정한 형식과 단출한 언어로 압축해서인지 완성된 작품은 평면인데도 깊이를 느끼게 하고, 정적 속에서도 미묘한 울림을 이끌어낸다.
최근 작품은 절제된 색채와 대비되는 필선으로 인간의 역동적인 몸짓을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작업을 하다 보니 절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회색 톤의 평면들 위로 연필과 색연필로 그린 세밀한 필치의 선을 다양하게 변주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가리키며 “색과 선은 내면적 갈등의 결과물인 동시에 분출물”이라며 “정신적 긴장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첨예한 순간들을 잡아내기 때문에 지성의 사색이 아니라 내면에 지닌 몸짓”이라고 설명했다. 그에게 그림이 뭐냐고 물었다. “그림은 전투(싸움)나 에너지(힘)”란 답을 내놨다. 정치적 싸움이나 분노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직 자기 심정을 전투적으로 토로하는 무한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공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978년 3월호(129호)에서 '확대되는 미술풍토와 기대되는 새 기풍' 좌담을 진행하며 국전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친형 이구열은 미술 비평가로 1970년대 이경성과 함께 '공간'에 연재를 싣기도 했다.